완벽해지지 마세요
가끔 머릿속에 구조가 잡히면서 하나의 완성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주로 정답이 없는 철학과 관련된 문제인 만큼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의견을 나눠보고 싶은 욕심이 들어요. 그래서 비주기적으로 이런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글을 써서 공유하려고 합니다. 팟캐스트처럼 읽힐 수 있게 구어체로 적으려고 해요.
오늘은 완벽에 대한 강박에 대해서 얘기해보려고 합니다.
요즘 AI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면서, 날마다 재미있는 것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최근에 나온 오픈클로라는 AI 비서가 정말 핫한데, 이걸 집에서 상시로 돌리기 위해 세계적으로 맥미니 열풍이 불고 있어요. 연결해 두면 어딘가에 적어놓은 글들을 모으고 전자책으로 가공하고, 혼자 회원가입해서 펀딩사이트에 올릴 정도라고 하니 상상만 하던 개인용 비서가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픈 클로 얘기를 꺼낸 이유는, 제가 오늘 주제인 완벽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제가 사용하고 있는 AI 비서 덕분이거든요. 회사에서 주원님이 만들어서 공유해준 비서를 좀 더 개인화해서 쓰고 있는데, 매일 아침에 전날 제가 남긴 기록들을 갖고 와서 피드백 레포트를 만들어줍니다. 한 번의 인터뷰를 통해 제 맥락을 넣어두고 일에 대한 생각부터 삶에 대한 생각까지 다양한 기록을 남겨두니 생각보다 괜찮은 영감들을 받고 있어요.
서론이 길었네요. 비서가 정리해 준 완벽에 대한 메시지를 이해하려면, 제가 갖고 있던 3개의 생각을 먼저 공유해 드려야겠죠.
- 일은 ‘Done is Better than Perfect.’
최근에 개발하면서 직접 코드를 손으로 치지 않고, 기획만 넣으면 개발까지 하는 에이전트를 고도화하고 있습니다. 클로드가 발전하면서 퀄리티가 기대 이상으로 올라와서 생산성에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는데, 오류를 스스로 잡아내고 개선하는 에이전트를 만들면 또 한 단계 높은 생산성을 갖추게 될 거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한 번에 완벽하게 개발하는 에이전트를 만드려고 프로세스를 계속 개선했습니다. 그런데 당연하게도 프로세스만 개선해서는 결국 생성된 코드는 0줄이었어요. 이대로는 끝이 없겠다 싶어서, 일단 어느 정도 구현된 프로세스로 한번 돌리고 다시 개선하는 에이전트를 또 만들기 시작했어요. 즉, 하나의 완벽한 프로세스보다 한 번 돌리는 것보다 돌리고 개선하는 걸 새로 만드는 전략을 택한 거죠. 이렇게 하니 실제로 코드도 만들어지고, 처음에는 고려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개선되었죠. 결국 완성이 완벽보다 낫다는 철학을 다시 한번 상기시킬 수 있던 계기가 되었습니다. - 의지와 좋은 결정
저는 강한 정신력에 대한 동경이 있는데요, 어떤 일이든 쉽게 포기하지 않고 싶어서입니다. 그만하는 건지, 포기하는 건지의 갈림길에서 후자를 택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덕분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김동현 밈처럼 힘들 때 고통의 역치를 높이는 훈련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만하고 싶다는 본능과 버텨야 한다는 의지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요? 저는 인간의 안락함이 좋은 결정을 내리는 것의 방해물이 된다는 생각이 있어서, 항상 의지로 버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개구리가 끓는 냄비에서 따듯하게 즐기다 죽게 되는 유명한 비유가 있죠, 본능만을 따라가선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 생각을 좀 더 연장하면, 대부분 의지로 본능을 억누르는 판단을 내려야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결론으로 귀결됩니다.
그런데 모든 결정을 의지로만 할 수 있을까요? 의지가 본능을 이길 수 있도록 강한 정신력을 가지는 것이 언제까지 가능할까요? 그렇다면 항상 좋은 결정을 내릴 수는 없는걸까요?
(여기서 말하는 본능은 논리와 대비되는 직관과는 다릅니다. 직관은 최적화된 결정의 산물이기에, 이성과 우열을 가릴 수 없고 균형을 맞춰야 된다고 생각해요.) - 브랜드로서의 가치
가치를 창출하는 기업의 형태로, 브랜드에 대한 의문이 항상 있었습니다. 제 무지와 부족함 때문이었음을 알지만, 창업가로서 창출하는 가치는 모두 숫자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어요. 시간을 몇 분 아껴준다거나, 가격이 몇 퍼센트 저렴하다거나. 더불어 구조적으로 해자를 갖출 수 있는 기업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전히 그런 기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있습니다만, AI가 너무 빠르게 발전하면서 기준이 많이 바뀌고 있어요. 만들기가 너무 쉬워지면서, IT 제품으로서 해자를 갖추기가 정말 어려워졌습니다. 더불어 IT 제품만으로 풀 수 있는 문제는 지난 10여 년간 우후죽순 쏟아지면서 많이 남아있지 않다고 보이기도 합니다. 많은 기업들이 해자에 대한 챌린지를 받고 있고, B2C에서는 네트워크 효과를 제외하면 정말 어렵다고 생각해요.
최근에는 구매의 행태도 많이 바뀌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가격을 포함하여 최적화된 구매를 했더라면, 구매 경험으로서의 만족감을 더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어요. 서울의 집값이 비현실적으로 오르면서 돈을 모아서 집을 사는 개념이 청년들 사이에서 많이 사라졌고, 립스틱 효과처럼 소확행을 위한 소비가 많아진 것도 한몫한다고 생각해요. 인플루언서가 사용한 제품이나 브랜드의 스토리 등 미디어에서 만족감을 주는 소비가 늘고 있습니다.
결국 브랜드가 가지는 중요성이 더 커진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관성 있는 철학으로 유저와의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 해자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3가지 생각을 가지고 클로드가 캐치한 공통점은 ‘완벽을 버린다는 것’ 이었습니다. 일에서는 그 맥락이 충분히 들어있다고 생각했어요. 다만, 의지나 브랜드 관련 생각에서는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 비서와 몇 번의 토론 끝에 결론을 얻어냈습니다.
완벽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좋은 시스템을 구축하는 전략을 택하라.
- 의지냐, 본능이냐 의 문제를 고민하는 이유는 좋은 결정을 내리기 위함일 거에요. 그 위에는 각자의 지향점은 다르겠지만 원하는 삶을 살겠다는 전제가 있을 거고요. 좋은 결정을 내리는 것에 대해 2가지 고민해볼 포인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종합하면 “완벽한 결정은 존재하지도 않고, 완벽에 가깝다고 믿는 결정을 내릴 시간에 의지를 활용하여 좋은 결정들을 지속해서 내리는 시스템을 구축하며 본능을 의지와 정렬시켜야 한다” 가 됩니다.
- 매 순간 전투를 벌일 수는 없다.
의지로 모든 결정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생물학적으로 의지는 에너지를 더 많이 소모하는 일이지만, 본능은 에너지를 축적하고자 하기 때문에 항상 충돌하게 됩니다. 작심삼일하게 되고, 의지를 많이 소모하면 번아웃에 도달하게 되는 이유죠. 우리는 의지 없이도 혹은 적은 의지로도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본능을 우리가 원하는 방향을 바라보게 바꿔야되겠죠.
다행히도 우리의 뇌는 지속해서 반복하다 보면 새로운 패턴으로 동기화가 됩니다. 의지로만 내리던 결정들을 우리는 본능에 기대어 내릴 수 있게 되고, 습관을 형성하는 과정과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행동 뿐만 아니라 태도나 기준도 내재화 할 수 있기에, 새로운 결정 앞에서도 우리는 이전의 내린 결정들을 통해 갖춘 본능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여전히 의지를 통해 본능을 수정하는 일은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강한 정신력을 갖출수록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에요. 처음부터 완벽해질 수는 없어요. 하지만 의지를 통해 하나씩 추가하고, 본능을 동기화하는 과정을 거치면 우리는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게 될 거라 믿습니다. - 완벽한 결정은 없다.
우리는 결정 하나하나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번의 결정이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는 착각을 하죠. 물론 실제로 그런 순간들이 있겠지만, 대부분의 변화는 무수히 많은 결정들의 산물입니다. 좋은 결정을 하는 것은 중요하기에 대충 선택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더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해 필요 이상의 압박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에 가깝습니다.
다행히 많은 선택들은 가역적이고 수정 가능하니, 잘못 됐다고 생각한 시점에 새로운 결정을 내리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요. 또한, 세상의 다변수와 복잡성을 인정하면 처음에 세운 시나리오대로 흘러갈 확률은 높지 않아요. 즉, 완벽한 선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반대로 예측하지 못한 도움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완벽한 선택을 내리려고 하기보다는 불완전한 결정을 내리더라도 결정을 맞게 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 훨씬 유리하죠.
- 매 순간 전투를 벌일 수는 없다.
- 어떤 기업이든 결국에는 독자적인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노력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게 곧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생존에 직결되는 문제일테니까요. 다만 첫 날부터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가치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이상적인 초기 팀의 스타팅 포인트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초기팀에게는 생존이 제일 중요한 만큼, 설사 시장에 존재하는 제품이더라도 유저에게 만족감을 주는 제품을 만들고 꾸준히 발전하며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 좋은 기업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해자가 없다고 생각하고 창출되는 가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더라도 철학을 공유하고 고객을 위한 결정을 반복하다 보면 브랜드로서 아이덴티티가 강해지고 좋은 기업으로 성장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니즈가 존재하는지 제품을 만들기 전에 검증해야 된다는 방법론과 다르게, 스타팅 포인트로서의 기준을 조정함으로서 좋은 스타팅 포인트보다 이후의 과정이 더 중요함을 의미합니다.)
장인 정신을 필요로 하는 특정 분야에서는 완벽함, 미친 수준의 디테일을 여전히 요구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삶에서 마주하는 결정들에서도 정답을 찾으려고 하면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정답인지 오답인지는 본인만 알기 때문에 해봐야만 압니다. 오답이 많이 나오더라도, 좋은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 생각하고 스스로를 믿고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어떠한 위대한 성과도 갑자기 나왔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극소수를 제외한 천재들을 제외하고는 대단해 보이는 사람들도 한순간에 이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결국 결정의 방향에서 오는 작은 선택의 차이와 내재된 태도에서 왔다고 생각해요. 물론 운이 따라줘야 하겠지만, 우리가 제어할 수 없으며 운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운이 올 때까지 버티고 나아가는 것뿐이니까요.
아마 제 주변에는 대부분 학창시절을 정답을 찾으라는 한국식 교육을 받았을 것이고, 삶에서도 정답을 찾으려는 태도가 무의식 속에 있을 거라 생각해요. 사회가 정해놓은 정답을 좇는 것도 개인의 삶에서 정답이 아닐 수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이 한 번쯤 ‘정답’ 과 ‘완벽’ 에 대한 생각을 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