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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삶의 의미를 찾지 말고 만들어라.

TL;DR

이 글은 『열한 계단』을 읽으며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정답”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태도”로 다시 이해하게 된 과정을 정리한다. 문학·종교·철학·과학·역사·죽음과 자아에 대한 질문을 따라가며, 결국 외부의 기준이나 완벽한 믿음보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삶을 사랑하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결론에 닿는다.

열한 계단을 읽고.

책을 읽으면서 느낀 감상은, 정말 한 계단을 같이 올라간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첫 계단에 놓여있었던 게 행운이라 느껴질 정도로 계단 하나하나가 정말 인상 깊고, 세상을 하나씩 열어주는 것만 같았다. 책에서 던지는 질문이 내가 궁금하다고 생각한 지점과 모두 같았고, 덕분에 정말 몰입해서 읽었다.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고민을 정말 많이 했다. 친구들과 술 마실 때마다 했던 왜 사는지, 각자가 어떤 사명감이나 궁극적인 목적을 가지고 사는지 궁금했다. 나는 여태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행동이라는 명목 하에 판단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했다. 대학에 들어와서 고민할 시간이 많아지고 부모님의 그늘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판단을 하게 되면서 정말 그 목표를 달성해야하나 하는 질문을 많이 던졌다.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결국 내 존재의 이유를 찾는 지경에 이르렀고, 친구들과 많은 토론을 해서 결론을 일부 냈지만 일부러 만들어진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무한게임과 열한계단을 읽으면서 안정감을 찾게 됐다. 무한게임을 통해 세상을 상대적인 등수와 수치를 목표로 보던 시야를 탈출하여 추구하는 신념과 미션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게 됐다. 그 전에도 미션에 대한 고민은 있었지만, 어떠한 수치를 달성하기 위함이었다면 선후관계가 바뀌어 미션 이후에 수치가 존재하게 됐다.

그리고 열한계단을 통해서는 그보다 더 궁극적인 내 존재의 이유에 대한 강박을 버릴 수 있게 됐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며 눈에 보이는 것만 믿었던 내가 세상의 복잡함을 인정하면서 모든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종교에 마음을 열게 되면서 종교의 교리나 주장에 대해서 들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첫 계단 문학에서 선과 악의 기준에 대해 재고해보게 되었다. 시간 낭비라 생각했던 문학은 나에게 불편한 분야였으나, 생각할 거리를 많이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더 넓은 세상을 보는 데 큰 도움이 되겠다 생각했다. 문학에 대한 관심이 생기며, 선과 악에 대한 기준 즉 내 행동에 대한 기준을 어디서 찾아야되나 고민하게 됐다.

두 번째 계단인 기독교, 세번째 계단인 불교에서는 담을 쌓았던 종교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행동에 대한 기준을 종교에서 찾았고, 종교를 믿는 것이 단순히 신을 믿는 것 이상으로 종교가 주장하는 교리를 믿는 것이 본질임을 깨닫게 됐다. 하느님이라는 존재에 기대는 기독교와 붓다를 등에 업고 중도의 길로 스스로 나아가는 불교가 일부 차이가 있긴 하지만, 결국 내면 세계에서의 구원이라는 공통점을 확인하며 현실 세계라는 한계를 마주하게 된다.

네번 째 계단에서 철학을 통해 실제 살아가는 인간에 대해 얘기한다. 내가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니체를 사실은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했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를 통해 어떤 믿음으로서 구원 받는 것을 비판했다. 종교부터, 중세의 합리론까지도 비판하는 것의 본질은 플라톤의 이원론의 연장선인 ‘이상 세계’가 존재하여 그것을 추구하는 것, 궁극적인 뭔가가 존재할거란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 계단에서 과학은 눈에 보이는 증거와 규칙을 통해 객관적인 시선을 가지게 해주지만, 여전히 주관적인 시선과 객관적인 시선의 합으로 ‘이상’을 바라본다. 하지만 여섯 번째 계단에서 체게바라 이야기를 통해 지나친 이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세상을 본인만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상적인 사람으로 정의하지만, 사회는 지나친 이상을 추구하다간 못처럼 튀어나올 수 있다는 표현으로 녹아들 수 없음을 의미한다. 체 게바라는 본인의 기준과 이상에 충실하며 정말 멋진 사람이었지만, 외로운 싸움이었다는 사실을 보면 그렇게 살아야할까 싶었다.

일곱 번째 계단에서는 현실을 이야기하며 왜 사회구조가 이렇게 되었는가를 보여준다. 전혀 관심 없던 역사를 밟으며, 생산수단의 소유가 사실은 계급을 나누며 국가라는 단체가 사실은 부르주아를 위해 만들어진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정말 충격적이었다.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엿보며, 사실은 이상적인 구조에 가까운 공산주의가 왜 현대 사회에서는 적용할 수 없는지 고찰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여덟 번째 계단에서는 이상과 현실 이후 삶을 보게 한다. 죽음의 문턱은 정말 예고없이 찾아온다, 그리고 인과관계를 모두 따질 수도 없고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태도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에서 메르세데스 소사의 삶을 사랑하는 태도를 논한다. 이상이나 현실이나 무언갈 쫓는 것이 중요하면서도 주어진 삶에 감사하고 여유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단 생각을 하게 됐다.

아홉 번째 계단은 죽음을 주제로 사후세계에 대한 내용인데, 이해하기 정말 쉽지 않았다. 사후 세계의 존재를 학문적으로 가치가 있는가와 별개로 개개인이 생각해보는 것을 구분한 점이 흥미를 끌었다. 내가 습득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죽으면서 마주하는 모든 존재는 감정에 의해 만들어지는 환영이기에, 사건이 일어났을 때 감정을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의 경험으로서 마주하면 감정을 더 주체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은 사람을 위한 책을 심리학자가 추천하는 이유가 그런 것이 아닐까.

열번 째 계단은 내가 여태 계속 답을 찾던 ‘나’에 대한 내용으로 힌두교에서 말하는 범아일여에 대해 다룬다. 이 부분은 여전히 일부만을 이해했다고 느끼며, 수행으로 도달해야 하는 영역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전에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상처를 포함하여 개인이 느끼는 감정을 아예 관전하는 주체에서 봐야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외부 세계라고 믿는 것은 사실 꿈을 꾸는 것과 같으며, 물리적인 공간 뿐만 아니라 의식의 공간을 의미하는 ‘브라만’과 관조자로서의 ‘아트만’ 을 동일시하여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마지막 계단은 나라는 존재를 초월해서 생각해보는 것을 끝으로 책은 마무리된다.

책의 목차를 외울 정도로 정반합을 통해 시야를 넓히는 경험이 너무 좋았다. 익숙한 책을 통해 전문성을 가지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으며 분업화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필요하지만, 불편한 책을 통해 시야를 넓히는 것은 삶을 하나의 여정으로 본다면 여정을 더 풍요롭게 만든다.

책을 다 읽고 결국 내 삶의 창조자는 나이며, 모든 것을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움직일 수 있는 존재로 나를 다시 보게 됐다. 어떠한 믿음도 내 삶을 구원할 수 없으며, 이상을 쫓다가도 현실과의 균형을 맞추고, 삶에 감사하며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태도를 지향해야 함을 느낀다.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끝없는 노력에서 삶의 의미를 만들어 나만의 여정을 떠나게 만들어준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한다.


아래는 읽는 것만으로는 액션 플랜을 세우기가 어려워 추가로 정리한 내용.

아홉번째 계단, 죽음.

사후 세계를 믿는가? 나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 주제이다. 티벳에는 죽은 사람을 위한 안내서가 있는데, 죽음 이후의 과정을 상세히 설명한다고 한다.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가, 실제로 그렇게 되는가는 어차피 검증이 불가능한 영역이라 관심이 없고, 그 과정이 생기는 이유와 어떻게 행동해야되는지에 대한 주장만 받아들이고자 한다.

  1. 사후세계에서는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존재들을 만나게 된다.
    •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사후 세계에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삶에서 잘한 것과 못한 것에 대한 판단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잣대는 종교나 외부 세계의 기준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2. 그런 존재들은 외부가 아니라 내 마음에서 만들어진다.
    • 그렇지만 꿈을 꾼다고 생각해보자. 꿈에서 나타나는 존재들은 결국 우리의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다. 착한 존재도, 무서운 존재도 결국 나의 의식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티벳 사자의 서에서는 사후세계를 하나의 ‘틈’ 으로 해석하는데, 꿈을 꾸는 것과 죽는 것은 비슷하다. 따라서 사후세계에서 마주하는 존재들 모두 꿈처럼 나의 마음에서 만들어진 존재들이다. 본인이 믿는대로 마주치는 이유이다. 불교를 믿으면 심판의 존재로 부처를, 기독교를 믿으면 하느님을 마주치는 것이다.
    • 우리가 흔히 의식하지 않고, 무의식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이때, 의식이란 하나의 드넓은 대지로 보면 편하다. 무의식에 발현되는 것들은 일련의 사건들이 드넓은 의식이란 공간에 남긴 잔상이다.
  3. 내 마음의 산물로서 그러한 존재를 마주치면, 느껴지는 감정을 제어할 수 있다.
    • 우리는 그런 존재가 마음에서 만들어진 존재임을 인지할 때, 마주쳤을 때 느껴지는 감정들을 주체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 꿈에서 무서운 존재를 만나더라도, 꿈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일부 편해지는 것과 같다. 우리가 휘둘리지 않고 제어할 수 있는 그런 주체성이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핵심이다.
    • 두려움, 허망함, 기쁨 모두 내 마음의 산물임을 받아들일 때 감정에 지배되지 않고 판단할 수 있다.
  4. 일상생활에서도 감정을 제어할 수 있어야 궁극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다.
    • 사후세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감정들이 그런 마음의 산물로 이해한다면 외부 사건을 내 마음이 받아들이는 하나의 경험으로 치환하여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감정이의 노예가 아니라 궁극적인 자유를 누리게 된다.
    • 감정의 노예가 아닌, 우리가 만들어낸 감정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 때 무의식에 대한 이해를 한 단계 높이며 내 삶을 창조자의 태도로 만들어갈 수 있다.
열번째 계단, 나

범아일여. 세상과 나를 동일시하라는 말이다. 말도 안 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조금은 이해할 듯 말 듯한 상태가 된 것 같아서 지금의 내 이해를 적어본다.

  1.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영원히 지속되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1. 그것이 기독교로는 영혼이다. 불교에서는 무아, 불변하는 자아가 없다고 생각하여 조금 다르다.
  2. 자아는 생각이나 감정, 신체를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살고 죽는, 에고와 신체를 가진 ‘지바’ 를 보고 있는 주체이다. 관조자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아트만’이다.
  3. 우리는 각자의 지바를 자아로 착각하는데, 지바는 사실 나의 자아인 아트만이 봤을 때 하나의 발현에 불과하다.
    1. 아트만이 바다고, 지바는 파도이다. 꿈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 어떠한 상호작용이 일어나지만 이건 꿈을 꾸는 사람의 내면이 만든 하나의 사건이다. 즉, 아트만이 만들어낸 하나의 사건에 불과하다.
    2. 꿈을 꾸는 사람은 나(아트만)이고, 꿈 속의 나는 지바이며, 꿈 속의 세계와 사건은 환영(마야)이다.
  4. 우리가 지바로서 삶을 살아갈 때는 나의 자아와 배경이 되는 세계가 있다고 착각한다. 사실 아트만 입장에서 봤을 때는 그저 사건이 일어나는 배경과 주체일 뿐이다. 그것이 이원론적 착각이다.
    1. 외부 세계에서의 사건을 통해, 내면의 세계에 고통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트만 위에서 일어난 하나의 연속된 과정이다. 즉, 외부의 존재란 없고 그저 내 마음에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이다.
  5. 결국 아트만과 브라만은 하나다. 외부 세계가 곧 내부 세계의 연장선으로 ‘눈’ 에 보이는 것일 뿐, 결국 보고 느끼는 것은 하나의 세계이다.
    1. 나는 나의 지바, 타인은 타인의 지바이지만 결국 하나의 공간에 존재하는 거고 그건 세상이다. 나의 아트만은 없다. 우리는 지바라는 경계에 ‘나’ 를 하나의 세계로 착각하는데, 나라고 주장하는 생각 조차 나에게 관찰되는 것을 보면 나는 결국 순수한 관조자다. 즉, 세상이다.
      1. 지바는 항아리고, 아트만은 공간 그 자체이다. 한 차원 위임을 잊지 말것.
    2.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의 끝은 결국 하나의 관조자로 도달하게 되고, 이 모든 것이 일어나는 공간과 동일시할 수 있다. 즉, 공간 그 자체이다.